의궤외에 철장이 관측되는 서적류는 인명, 토지 기록류가 있습니다. 여기에 속한 유물들은 선생안, 호적대장, 양안, 지리지, 그리고 관련 성책류가 있습니다.
특히 지역 관찬서들은 왕실 보관 및 진상을 위한 중앙정부의 서적들에 비해, 장식적 목적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어람용 목적이 없기 때문에 방향성이 달라 철장의 형태와 실용적인 사용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조선 왕조는 3년을 주기의 식년(式年)을 주기로 지역의 호구를 조사해 조세에 활용했습니다. 호적대장은 이러한 조사 결과를 성책해 지역/중앙관청에 1부씩 보관하던 참고 자료입니다.
지역별 호적대장의 크기와 분량은 다양했으나 공통적으로 매우 크고 두꺼운 형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국내에 연속적으로 작성된 호적 대장류는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 관한 것들입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도 대부분 지역의 호적 대장이 유실되어 경상도 지역의 유물이 주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단성현 호적대장은 경상도 단성현의 호구를 조사해 엮은 관찬서로 지역 공동체의 연속적인 가계 변화와 시대별 변화 양상을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호적 제도의 내용상의 특징만으로도 이 유물의 가치는 막중하지만, 그 외에도 조선 시대 고유한 서적 장적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로써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단성현 호적 대장은 철장본일 뿐만 아니라 철물로 된 원환이달려있는 만큼 원환의 사용 용도에 대한 조사에도 유용한 유물입니다.
문화재청에서 제공하고 있는, 향교 내에 호적장을 목재 기구에 걸어 보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경상 국립대에서도 이러한 보관법을 사용하는 점에서 원환의 보관시 사용 방법에 대한 이해 혹은 적어도 다른 유물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단성현 호적장과 비교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국내에 남은 유물 13책 중 경상국립대에 10책이, 2책은 향교에서 소장중 분실, 나머지 한 책은 규장각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대에 개장이 한번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데 원환의 크기가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대구부 호적대장은 매우 크고 다양한 양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성현 호적과 유사한 유물이 많으나, 원환이 2개가 달려있는 형태가 보이고, 다른 호적대장류가 그렇듯이 후대로 가면 선장류로 바뀌는 등의 다양한 형태가 관측됩니다.
대부분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대구장적"이란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출판된 "대구부사"에는 한 면을 할애해 "대구부 호적대장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호적대장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록을 보면, 일제 강점기 시기에도 대구부 호적대장을 제외하고는 조선 시기 호적 대장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울산부 호적대장은 경상도 울산부 지역의 호적 기록을 모아 관아에서 관리한 호적대장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있습니다. 광해군-1900년 초까지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중 광해군, 순조시기 호적대장에서 철장 형태가 관측됩니다.
광해군 시기의 철장은 현재 현대식으로 개장되어 있는 형태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철장 형태와 다른 점은 없어 보입니다. 순조시기와 형태가 다른데 중간에 변화한 것인지 개장과정에서 형태가 바뀐것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순조시기 울산부 호적대장에서 관측되는 철장은 특이하게도 변철이 없고, 원환이 대구부 일부 호적류 처럼 2개가 달려있다는 점이 눈에 띔니다. 규장각 소장본들의 표장 전체가 전산화 되지는 않은 만큼, 차후 전산화에서 특이한 형태가 더 눈에 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양현 호적대장은 울산부 언양현 지역에 관한 호적대장으로 울산시청 문화재관리과에서 보관하다 현재는 울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개장 전 표지가 보이는 6책에서는 철장 흔적이 잘 보이는 점에서 철장본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 확인 될 수 있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보여지는 장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해당 개장은 언양현 호적대장 영인본을 만들기위해 조사 과정에서 연구실에서 선장으로 개장한 것으로, 초기 장정은 철장으로 되어있었습니다(윤지현, 이지은, 울산기록물의 현황과 활용방안, 울산학 연구, 2, 2007). 특이한 점은 발견 당시 문헌에 따르면 중앙부 앞, 뒤 각각에 원환이 2개씩 달려있었다고 합니다(김석희, 조선후기 경상도언양현호적대장에 관하여,부산사학, 7, 1983).
양안은 토지를 조사한 후 소유권과 형태를 기록해 보관한 관청문서입니다. 전안, 타량성책, 도행장, 철권, 전적 등의 이름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로 "타량"은 토지를 측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 "성책(成冊 )"은 문서를 모아 책 형태로 만드는 행위와 그 결과물을 의미합니다.
양안류는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나 무쇠로 만들어진 양안류는 대부분 경기도와 충청도권의 토지를 조사한 광무양안류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호적대장과 유사한 형태로 가로로 길고 세로로 짧은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이외에 전라남도에서 작성된 도행장(導行帳 )이 일부 수장되어 있습니다.
광무 양안은 근대 시기 만들어졌으므로 여러 문서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장으로 바뀌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문서들에 철장을 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책류는 인명 기록으로 특정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명 기록입니다. 선생안, 제명록, 제명기, 고왕록, 향안 등 다양한 이름이 이러한 문서류에 사용됩니다. 부사 선생안, 상주목 선생안, 호남도선생안,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지방 관청에서 다양한 지위의 관직에 부임한 일원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앙관청에서도 왕자사부 선생안, 호조의 역임 관리들을 기록한 선생안들을 만들어 관리해 왔습니다.
이외에도 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급제선생안 등 특정한 자격을 갖춘 일원들의 명단으로써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이중 향리, 도지사, 급제자 등을 기록한 선생안들에서 철장 형태가 자주 보입니다. 이러한 문서류에서 발견되는 철장들은 모두 황동으로 장식된 선장본이며 일부 선생안들에서는 특이한 구조도 발견됩니다.
특히, 유일한 민간 기록물이 안책류에 있습니다. 경상도 지역의 용산 서원과 거창 항교 소장 향안, 전라도 지역의 광주 향교에 있던 "광주향좌목" 들은 민간 기록이나 철장 형태가 보이며 서문에도 기록이 보입니다.
지리지는 세종 초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세종실록에 지리지가 수록되어 있으나 본래는 전국의 지리지를 만들고 보관해 오다가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 지리지를 제외하고 소실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도 지리지와 경상도 속찬 지리지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현존하는 지리지들은 세종시기 초기와 예종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들로 조선 초기 부터 철장을 관청 서류의 형태로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 사료입니다